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부동 전투 (문단 편집) ==== 미군의 증원 ==== 백선엽은 사단 [[군사 고문단|고문관]] 메이 중위를 미 8군 사령부에 보내 증원을 건의하게 하여 미 제8군사령부에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다부동 일대의 국군 제1사단의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백선엽의 요청으로 경산에 있던 미 제25사단 27연대, 37야포대대, 8야포대대를 진목정으로[* 여기서 진목정에 투입된 27연대는 한국전쟁 최초의 전차전인 '볼링장 전투'를 치렀다.], 23연대를 두모동으로 투입하여 종심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부대는 20시에 다부동 부근으로 전진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8월 17일, 8월18일 >"연대는 미군부대와 협동하여 0930시를 기하여 우 6사단 10연대와 좌 12연대와 연결하여 제2대대는 예비대로서 진목정(513~616)에 위치하여 부대와 부대와의 간격을 이용하여 침공하는 적을 대비하고 좌로 제3대대는 △673.8(49.6~62.0) 무명고지(49.0~62.4)-(49.4~62.4)을 점령하고 있었음" >---- >''' 《제1사단 11연대 다부동지구전투상보》中''' 그러나 이때의 이면을 보면[* 수암산-유학산고지전투의 '비참한 현실'을 참조하면 좋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다부동전투'따르면 >"야간에 운반하다가 도중에서 희생되는 노무자가 속출한 까닭에 다음날 정오가 되기도 전에 실탄이 떨어지기 일쑤이고, 굶주림과 불벝더위에 시달린 장병들은 피와 시체가 썩은 물이 뒤섞인 개울물을 마시며 갈증을 풀고, 솔잎을 씹으며 허기진 창자를 달래기도 하였다." 라고 나와있다. 한편, 17일 재편성을 실시한 제11연대는 학도병을 포함한 300여 명을 제1대대에 보충하였다. 18일 09시 30분에 제11연대 제1대대는 증원된 미 제27연대의 좌측을 엄호하고 제2대대는 우측을 엄호하여 전차와 포병사격을 지원받아 반격을 실시했다. 제2대대는 우측 355고지부근의 예비대로서 적의 침공을 대비하고 제3대대는 673고지를 공격했다. 19시를 기하여 356고지까지 진출하는 동안 적은 조금밖에 저항하지 못했다. 이는 미군이 갑작스레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전차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대대는 적이 지형의 이점을 잘 활용했기 때문에 목표를 점령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3대대장은 제10중대장에게 야간공격을 실시하라고 했으나, 10중대장은 아래처럼 건의하였다. >포지원을 받으면서 주간공격을 하여도 매번 실패를 하였는데 훈련이 미숙한 신병을 지휘하여 야간공격하라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나의 생각으로서는 다른 중대로 하여금 2일간 주야간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기만공격을 가한다면 적도 피로하여질 터이니 이러한 효과를 노려서 낮에 특공대를 편성하여 공격을 한다면 성공할 희망도 있으니 그렇게 하여 주시면 그때의 공격은 저의 중대가 담당하겠읍니다. 대대장은 중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9, 11중대로 하여금 기만공격을 펼치게 했고 20시에 적이 전차 2대와 보병으로 미군진지를 습격하자 전차를 격파하고 보병 사상자 100여 명을 내고 적은 퇴각하였다. 한편 제15연대 2대대는 재편성을 마치고 병사들에게 휴식시간을 주면서 연대장이 355고지를 방문해 대대병사들을 격려하였다. 19일 적은 작일의 막대한 피해로 금일에는 공격행동이 보이지 않았다. 이날 군단에서는 육본작명 139호에 의거하여 8사단에 10연대가 제2군단에 배속되자 1사단 사단장 [[백선엽]] 준장에게 지휘토록 하였다. >제2군단사령부 >一.(1)적의 주력은 여전히 아 제1사단 정면에 지향하고 군위-다부동-칠곡방면으로 남하를 기도하고 있음. > (2)군은 연합군 지원 하에 차후반격을 준비중임. >二.군단은 일부증원부대의 증원을 얻어 "Y"선을 확보하려 함. >三.(1)육본작명 139호에 의하여 제10연대는 1950년 08. 18. 18:00부로 제2군단에 배속함 > (2)제1사단장은 전기 제10연대병력을 통합 지휘하라. >四.생략 >五.생략 >제2군단장 육군준장 [[유재흥]] >---- >''' 《제2군단 작전명령 제15호》''' 20일을 전후하여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2군단장 유재흥은 19일 'Y'선을 견고하게 하기 휘해 [[제8기동사단|제8보병사단]] 10연대를 제2군단 1사단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유학산을 방어하고 있던 인민군 15사단과 8사단이 20일 영천과 신녕으로 향하면서 [[영천·신녕전투]]가 시작되었다. 한편 15연대 2대대는 08시에 행군을 시작하여 제11사단과 미군의 지원 하에 356고지를 공격하였고 08시 35분에 적과의 치열한 백병전으로 08시 40에 356고지를 완전탈환하였고 적은 신주막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또 23시에 특공대 1개중대를 파견하여 야간을 이용하여 DQ468893지점의 포진지를 기습하여 야포 3문, 직사포 1문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